작품으로 돌아가기
관찰 산문2화NEW

사물이 기억하는 것

일기장에는 되고 싶은 내가 적히고, 물건에는 반복된 내가 남는다. 우산 세 개, 머그컵 손잡이, 닳은 신발 뒤축의 진술 목록.

오래 보기
비닐우산 세 개와 손잡이 방향이 같은 머그컵, 닳은 신발과 영수증을 표본처럼 늘어놓은 잉크 담채 삽화

이사를 도우러 간 친구의 집에서, 나는 짐 싸는 일보다 물건 구경에 자꾸 한눈을 팔았다. 물건들은 주인에 대해 말이 많았다. 본인은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물건들이 대신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 내 방을 남의 방처럼 둘러본다. 여기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물건들의 진술을 목록으로 받아 적어 본다.

기록

현관의 우산 세 개. 전부 편의점 비닐우산이고, 전부 산 날의 비 냄새 같은 것을 갖고 있다. 이 사람은 일기예보를 챙겨 보는 사람이 아니다. 비를 매번 처음처럼 만나는 사람이다.

머그컵 손잡이의 방향. 설거지해서 엎어 놓을 때마다 손잡이가 전부 오른쪽 뒤를 향해 있다. 스스로는 대충 놓는다고 생각했는데, 손은 매번 같은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몸에는 본인만 모르는 규칙이 산다.

물건의 증언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다짐이 아니라 빈도를 기록한다는 것이다. 일기장에는 되고 싶은 내가 적히고, 물건에는 반복된 내가 남는다. 어느 쪽이 더 진짜냐고 묻는 것은 좋은 질문이 아닌 것 같다. 둘은 서로 다른 시제의 기록일 뿐이다. 하나는 미래형, 하나는 현재완료형.

기록

책상 서랍의 영수증 뭉치. 버리지 못한 게 아니라 안 버린 것이다. 어떤 영수증은 그날이 남긴 유일한 기록이라서. 4,500원짜리 커피 영수증이 어떤 하루의 전부를 대표하기도 한다.

신발 뒤축. 오른쪽 바깥이 먼저 닳는다. 십 년째 그렇다. 걸음을 고쳐 보려던 계절도 있었는데, 신발은 그 계절이 짧았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책장의 책등. 접힌 자국이 있는 책과 새것 같은 책. 끝까지 읽은 책이 어느 쪽이냐 하면, 접힌 쪽이 아니라 뒤표지가 볕에 바랜 쪽이다. 오래 꽂혀 있던 방향이 그 방의 창을 가리킨다. 책장은 독서의 기록이면서 채광의 기록이다.

물론 물건의 진술에도 한계는 있다. 물건은 빈도를 알지, 사정을 모른다. 우산 세 개는 일기예보를 안 보는 사람의 것일 수도 있고, 우산을 잘 잃어버리는 동생에게 자기 우산을 매번 내어 주는 사람의 것일 수도 있다. 물건만 읽고 사람을 판정하면 그것은 관찰이 아니라 소설이 된다. 물건의 목록은 질문을 만드는 데까지만 쓰는 편이 좋다.

그래도 나는 이 목록 만들기를 그만두지 못한다. 자기소개보다 책상 서랍이 하는 말이 재미있을 때가 많아서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쓸 때 형용사를 고르지만, 물건들은 부사로 말한다. 자주. 매번. 오래.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는 형용사보다 부사가 쓸모 있을 때가 많다.

기록

오늘의 마지막 항목.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의 키보드. N과 M 사이 어딘가가 반들반들하다. 어느 손가락의 무슨 버릇이 만든 광인지 나는 모른다. 내 물건인데도 모르는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 목록을 계속 쓰게 만든다.

방을 나서기 전에 한 번만 뒤돌아보자. 거기 있는 물건들은 전부 당신이 고르고, 남기고, 되풀이해 만진 것들이다. 그 목록이 하는 이야기를 다 믿을 필요는 없다. 다만 한 번쯤 들어 볼 만은 하다.

다음 여백

다음 산문은 밤에 관한 것입니다.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어두워진 뒤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본 장면

A Selvora Original · Mina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