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으로 돌아가기
단편 연작3화NEW

재고 조사

표지에 ‘재고’라고 적힌 공책에는 값이 없다. 판 물건과, 본 것 하나. 결론 없이 사십 년째 이어지는 장부.

문진문구의 밤
갓등 아래 펼쳐진 낡은 장부 공책과 깎다 만 연필, 잉크병을 그린 잉크 담채 삽화

계산대 안쪽에는 공책이 한 권 있다. 표지에는 ‘재고’라고만 적혀 있다. 세무서에 보여 줄 일이 생기면 곤란해지는 종류의 재고 장부다. 팔린 물건은 다 적혀 있는데, 팔린 값이 없다. 대신 다른 것이 적혀 있다.

기록

시월 둘째 주. HB 연필 한 다스. 목요일마다 오는 남자. 필압이 세서 연필이 빨리 닳는다고 했다. 지우개는 한 번도 산 적이 없다. 안 지우는 사람인지 못 지우는 사람인지는, 장부가 알 일이 아니다.

저 마지막 문장 같은 것이 이 공책의 문법이다. 주인은 사람에 대해 두 가지만 적는다. 산 물건, 그리고 본 것 하나. 본 것에서 결론 쪽으로는 한 발도 나가지 않는다. 언젠가 이유를 물은 사람이 있었다. 대답은 짧았다. “물건을 적으면 관찰이 되고, 사람을 적으면 단정이 됩니다.”

기록

시월 셋째 주. 4B 지우개 두 개. 그림 그리는 아이. 지난달에는 지우개를 아껴 쓰느라 그림이 자꾸 어두워졌는데, 두 개를 사 가면서 얼굴이 펴졌다. 지우는 일에 허락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같은 주. 편지지 스무 장. 세 번째 문장이 막힌다는 사람. 스무 장이면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다. 오지 않는 것도 소식이다.

공책은 이것으로 열두 권째다. 첫 권은 사십 년 전 것인데, 글씨가 지금보다 급하다. 그때는 본 것 하나가 아니라 서너 개를 적었고, 가끔은 결론도 적었다. ‘수상함.’ ‘좋은 청년.’ ‘다시 안 올 듯.’ 다시 안 올 듯이라고 적힌 사람이 삼십 년째 오고 있다. 주인이 결론을 끊은 것이 그 무렵부터라고, 공책들의 글씨가 증언한다.

기록

십일월 첫 주. 블루블랙 잉크 한 병. 마감 이십 분 전에 온 사람. 펜은 오래된 것, 잉크만 새것. 서랍이 한 통 무거워졌다.

같은 주. 스케치북 한 권. 지우개 아이가 데려온 친구. 자기는 안 산다고 하다가 문 앞에서 돌아와 샀다. 문 앞까지의 거리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십일월 둘째 주. 판 것 없음. 우산 없이 비를 긋고 간 사람. 삼십 분쯤 문구 구경을 했다. 비 긋는 사람에게 뭘 보고 있느냐고 묻지 않는 것도 재고 관리에 든다.

적히지 않는 것들도 있다. 주인은 손님의 이름을 적은 적이 없다. 알게 되어도 적지 않는다. 이름은 물건이 아니고, 이 공책은 어디까지나 재고 장부이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은 산 물건의 자리로 공책에 남는다. 목요일의 연필. 두 개의 지우개. 밤이 덜 빠진 잉크.

기록

십일월 셋째 주. 형광펜 노랑 하나. 처음 온 사람. 밑줄 그을 데가 생겼다고 했다. 어디에 긋는지는 말하지 않았고, 묻지 않았다. 노랑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는 것만 적는다.

자정이 되면 주인은 그날 치를 적고 공책을 덮는다. 마지막 줄은 사십 년째 같다. ‘오늘 팔지 않은 것, 서랍.’ 그 줄을 적을 때만 주인의 얼굴은 장부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잠깐, 일기 쓰는 사람의 것이 된다.

열두 권을 다 읽으면 이 골목의 사십 년을 알게 될까. 알게 되는 것은 아마 다른 종류의 일일 것이다. 누가 언제 연필을 바꿨는지. 누가 어느 계절에 편지지를 샀는지. 결론이 없는 기록은 불친절한 대신 오래간다. 단정을 미룬 문장만이, 삼십 년 뒤에 읽어도 틀려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