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의 추신에 나는 새벽에 쓴 편지를 정오에 다시 읽었다고 적었다. 그 한 줄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 이번에는 하루를 통째로 다시 읽기에 쓰기로 했다. 규칙은 두 가지. 처음 읽는 것은 펴지 않을 것. 그리고 시간마다, 달라진 것을 적어 둘 것. 아래는 그 하루의 일지다.
오전 9시 20분. 책장에서 열두 해 전의 소설을 꺼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옛 밑줄과 만난다. 파란 볼펜으로, 자를 대고 그은 줄. 지금의 나는 자를 대고 밑줄을 긋지 않는다. 언제 그만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습관이, 밑줄 속에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오전 10시 반. 밑줄들이 낯설다. 왜 여기에 줄을 그었을까 싶은 문장 밑에 줄이 있고, 지금이라면 모서리를 접었을 문장은 맨몸으로 지나간다. 스물몇 살의 독자와 지금의 독자는 같은 책에서 서로 다른 책을 읽는 모양이다. 밑줄은 좋은 문장의 목록이 아니라, 그 무렵의 내가 무엇에 부딪히고 있었는지의 목록이었다.
정오. 밥을 먹으며 책 대신 휴대폰을 열었다. 규칙 위반은 아니다. 삼 년 전의 메시지도 다시 읽기의 목록에 넣어 두었다. 언젠가 이 연작의 첫 글에서, 답장을 기다리며 옛 메시지를 위로 위로 거슬러 읽던 저녁을 적은 적이 있다. 그때는 기다리느라 읽었고, 오늘은 읽으려고 읽는다. 같은 손가락 동작인데 전혀 다른 일이다. 다시 읽은 대화 속에서 그 사람은 같은 것을 두 번 물었고, 나는 두 번 다 딴 대답을 하고 있었다. 삼 년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오늘은 첫눈에 보인다.
오후 3시. 접힌 페이지를 만났다. 열두 해 전의 내가 접어 둔 모서리. 이유를 찾으려고 그 페이지를 두 번 읽었는데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여기에 무언가를 맡겨 두고 갔는데, 보관증이 없다. 찾지 못한 채로 모서리를 도로 접어 두었다. 다음 다시 읽기의 몫으로.
오후 5시 40분. 창이 주황으로 바뀌는 시간에, 다시 읽기와 기억하기의 차이를 적어 둔다. 기억은 요약본이고, 요약은 매번 지금의 내가 고쳐 쓴다. 다시 읽기는 그 요약을 원문과 대조하는 일이다. 대조에서 기억은 자주 진다. 기억 속에서 다정했던 답장이 실제로는 사무적이었고, 기억 속에서 길고 험했던 다툼이 실제로는 여섯 통의 짧은 메시지였다.
밤 10시. 소설의 마지막 장. 결말을 아는 이야기는 처음 읽을 때보다 느리게 읽힌다. 서두를 이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제야 결말로 가는 길가에 서 있던 문장들이 보인다. 처음 읽기가 어디로 가는지의 독서라면, 다시 읽기는 어떻게 가는지의 독서다.
새벽 12시 40분. 오늘의 마지막 항목. 새 밑줄을 그을지 한참 망설이다가, 연필로 그었다. 열두 해 전의 볼펜 옆에 오늘의 연필. 다음에 이 책을 펴는 사람은 한 여백에서 두 명의 독자를 만나게 된다. 둘 다 나라는 사실은,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루를 닫으며 적는다. 다시 읽기가 보여 준 것은 문장이 아니라 간격이었다. 파란 볼펜과 연필 사이. 두 번 물었던 사람과 이제야 그것을 알아본 사람 사이. 그 간격이 내가 걸어온 거리인지, 흘리고 온 것들의 목록인지는 오늘 정하지 않기로 한다. 정하지 않은 채로 책을 덮는 것. 오늘의 다시 읽기는 거기까지다.
다음 여백
다음 글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접어 둔 모서리 하나쯤은 접힌 채로 두셔도 됩니다.
다른 각도에서 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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